사람마다 창의성 끌어내는 ‘창조공간’ 있다

겹침의 미학으로 생동하는 홍대 앞처럼…


GIS United 송규봉 대표


홍대상권의 확장세

 <지도 1> 2006~2013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전철역별 이용객 증감율

 

홍대상권은 승용차가 부담스럽다. 방문객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홍대상권에는 공용주자창 거리가 있다. 홍대 주차장 골목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퇴근 무렵에도 빈자리가 있었다. 요즘은 점심이 되기 전에 가득 찬다. 점심 시간 한참을 빙빙 돌아야 겨우 빈자리를 만나곤 한다.

상권도 흥망성쇠를 겪는다. 상권은 사람이 좌우한다. 사람의 흐름은 교통통계에 흔적을 남긴다. 2013년 서울시의 교통수단별 운송분담율은 지하철(38.2%), 버스(27.4%), 승용차(23.1), 택시(6.9%) 순이다. 서울시 지하철은 9개 노선에 302개 전철역이 있다. 하루 평균 서울시 전철 이용객 718만 명 중에서 2호선은 29%208만 명이 타고 내린다. 9개 노선 중에서 가장 붐빈다.[1]

수능 시험날 서울의 고사장에는 ‘2호선에 있는 대학 가세요응원문구가 등장한다. 전철역은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다. 문화를 대변하기도 한다. <지도 1> 시청역에서 오른쪽으로 가보자. 한양대, 건국대, 교대, 서울대, 홍대, 연세대, 서강대, 이대, 경기대로 연결된다. 지하철 2호선은 나머지 8개 노선과 만나며 타원형으로 연결된다. 서울에서 유일한 순환형 노선이다. 하나로 연결되지만 역세권마다 모이는 사람과 문화는 서로 다르다.

  홍대입구역은 4위로 올라섰다. 2호선 전철역은 모두 50개다. 2006년 홍대입구역은 연간 지하철 승하차 이용객 기준 14위였다. 홍대입구역은 20063453만에서 20135001만으로 1547만 명이 늘었다. 신도림역에 이어 순증가 2위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2호선 전체 이용객은 7%가 늘었다. 홍대입구역의 이용객은 44.8%나 가파르게 늘었다. 대학가 상권이 모두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도 1>2호선 전철역별 이용객 증감율을 보여준다. 신촌(연세대), 이대, 한양대 전철역은 이용객이 줄었다. 홍대상권은 방문객의 규모, 상승폭, 확장성에서 주목할만한 기록을 보여준다.

 

중첩의 공간미



<사진 1·2>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왼쪽)·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오른쪽)[2]

 

홍대상권은 점점 자라고 있다. 동교동, 연남동, 상수동, 합정동으로 확장 중이다. 요즘 홍대상권이 더욱 주목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겹침의 매력이다. 겹침이란 서로 다른 것이 포개지는 것이다. 홍대상권에는 옛 것과 새 것, 한국적인 것과 이국적인 것, 장르와 장르의 겹침이 다양하다. 겹침의 매력은 대로변의 대형빌딩이 아니라 이면도로와 골목의 건물에 있다.

오랫동안 자취방이나 원룸 주택으로 사용되던 건물들이 레스토랑과 옷가게로 변신했다. 신축건물에는 없는 리모델링 건물만의 매력이 있다. 겹침은 가게 안에서도 빚어진다. 이국적인 인테리어로 세련된 레스토랑인데 고등어·갈치를 구워 판다. 레게풍의 음악과 남미 스타일의 치킨요리도 특이하다. 터키식 피자, 네덜란드식 팬케익, 포르투갈식 샌드위치도 맛볼 수 있다. 타국의 풍미가 한국적 입맛으로 변주되어 중첩의 층위(layer)를 만들어낸다.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매력도 중첩에 출발한다. 원래 화력발전소였던 역할은 1981년에 끝났다. 20년 동안 런던의 흉물이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이 2000년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사진 1>처럼 겉모습은 세월의 풍상 그대로다. 하지만 미술관 내부는 파격으로 가득하다. 서울 경복궁 옆에는 오랫동안 국군 기무사 건물이 있었다. 군대의 비밀정보를 취급하던 건물이 현대미술관으로 변신했다. <사진 2>2014년 새로 개관한 미술관 내부 모습이다. 과거와 현재 서로 다른 층위가 포개졌다.

 

창의적 다양성

<지도 2> 서울 지하철 2호선 전철역 주변 식음업소 경쟁밀도(OO카드 2013년 블록집계 빅데이터)

 

홍대상권의 두 번째 매력은 창의적 다양성이다. 홍대 정문과 상수역 사이에 서교동 408번지 블록이 있다. 한 바퀴 둘레는 700미터다. 국제규격 축구장 둘레의 2배 길이다. 408번지 블록 안은 다양하다. 꼬막과 냉이가 들어간 파스타, 8가지 쌈을 맛볼 수 있는 밥상, 인도와 유럽의 거리에서 공수해온 가로등이 놓인 카페, 제주도식 고기국수, 진짜 새우로 튀겨낸 새우깡안주, 전병 과자점, 패션 디자이너들의 편집매장이 그렇다. 작은 블록이지만 창의성의 밀도는 높다.

창의적 개성들이 층층이 겹친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눈길은 바빠진다. 가게마다 특이한 이름, 간판, 콘텐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호객한다. 가게 분위기는 공연 포스터처럼 각양각색이다. 평범하면 파묻히기 쉽다. 뻔한 가게는 버티기 힘들다. 유명 연예인이 서교동 408번 블록에서만 서로 다른 다섯 개의 프랜차이즈 매장을 실험했다. 단 한 곳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는 없고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가게들의 생존률이 높다.

<지도 2>는 지하철 2호선을 기준으로 식음분야 가게들의 공간 밀집도를 담았다. 신용카드 빅데이터팀과 수도권을 1 3300개 블록으로 쪼개 소비패턴을 분석했다. 블록별 경쟁밀도도 살펴보았다. 서울시 5626개 블록에 영업 중인 식음업종 107620개 업소를 분석했다. 식음분야만 따로 <지도 2>에 시각화했다. 식음분야란 고기, 분식, 별식, 양식, 일식, 제과, 주점, 중식, 치킨, 커피, 패스트푸드, 퓨전, 한식, 해물로 세분화했다. 홍대상권은 서울에서 가장 강력한 식음업소 경쟁밀도를 보였다.

 

젊음·여성·새벽·양식

<도표 1> 서울 지하철 2호선 8개 역세상권 신용카드 식음분야 지출비율 비교분석

 

상권의 특징은 서로 비교할 때 두드러진다. 반경 700미터 동그라미를 지도에 그려 8개의 비교상권 위에 포갰다. <지도 2>에 점선 동그라미로 표시했다. 동일한 면적으로 신용카드 빅데이터 소비패턴을 분석하기 위해서다. <도표 1>8개 상권을 비교하기 위해 일부 요인만 추렸다. 이번 분석은 8개 상권에 영업중인 13428개 업소에서 1년 동안 OO카드로 식음분야에 결제한 총 12584억원에 대한 분석결과다.

종로·을지로상권의 매출규모가 가장 크다. 강남역, 구로디지털, 선릉, 종로·을지로 이상 네 곳은 기업체의 종사자가 많은 오피스 상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건대, 서울대입구, 신촌, 홍대상권은 대학가 상권이다. 대학가 상권 중에서는 홍대상권의 매출규모가 가장 크다. 신촌과 서울대입구 두 지역을 합한 것보다 크다.

홍대상권의 특징은 여성과 젊음이다. <도표 1>에서 8개 상권의 평균 여성 결제비중은 41.6%. 홍대상권의 여성 지출 구성비가 47.5%로 가장 높다. 가장 낮은 구로디지털상권에 비해 12.5%포인트가 높다. 20~30대 젊은 층의 비율은 선릉상권에 비해 21.2%포인트 높고 20~30대 비율이 높은 강남역상권에 비해서도 5.3%포인트 높다.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시간에 일어난 새벽매출과 양식비중도 두드러진다.

성장하는 상권의 특징은 젊은 층의 지속적인 유입이 가장 중요하다. 젊은 이의 발길이 줄어드는 상권은 예외 없이 어려움을 겪는다. 80년대 신촌·종로3, 90년대 압구정동, 2000년대 신사동은 젊은 층의 발걸음으로 흥하기도 하고 쇠락을 경험하기도 했다. 젊은 역동성이 깃드는 거리에는 새로운 활기와 전에 없던 실험으로 가득하다.

 

봉준호의 만화가게

 

홍대 앞 만화가게에 가본 적이 있는가? 영화감독 봉준호를 만날 지도 모른다. “<설국열차>를 처음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가 언제인가요?” 기자가 물었다. “제가 처음 샀던 <설국열차> 만화책을 봤더니 ‘2005 1. 홍대 앞샵에서라고 적혀있더라고요. 2005 1, 그때 홍대 앞에 제가 자주 다니는 만화 가게에서 처음 봤죠.” 봉준호 감독이 대답한다. <설국열차>는 그렇게 홍대 앞 만화가게에서 시작되었다.[3]

기자는 어디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지 물었다. 봉감독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화면 안에 이상한 조합으로 있을 때 자극을 받고 흥분하게 된다고 했다. “록 콘서트를 찍을 때 보면 가수 뒤쪽에서 찍은 화면 있잖아요. 한 명의 기타리스트가 서 있는데 그 앞에 수만 명의 관객이 꽉 차 있다거나 ……” 이런 장면은 영화 속에서 반영된다. <설국열차>에서도 여자 주인공 틸다 스윈튼이 연설할 때 꼬리 칸 사람들이 쫙 서 있는 장면이 그렇다. 그가 사진 한 장을 2시간씩 들여다보는 이유다.  

봉감독의 작품은 중첩을 중시한다. 평범한 일상에 독특한 소재를 중첩시킨다. <괴물>에는 익숙한 한강, 매점, 다리에 괴물을 집어 넣어 이질적인 느낌을 만들어 낸다. <살인의 추억>에는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끔찍한 살인현장을 배치했다. <마더>의 시작장면은 인상적이다. 고즈넉한 초원에서 정신이 몽롱한 표정의 주인공 김혜자의 독특한 춤장면을 조합한다. 전혀 다른 소재와 이야기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서로 충돌하며 독특한 정서를 자아낸다.

 

<사진 3> 봉준호 감독의 장편영화 다섯 편(연대기순)

 

영감은 당신의 온 주변에 있다

 

폴 스미스(Paul Smith)는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다. 패션산업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처음 시작은 의류창고 보조였지만 나중엔 세계적 거장이 되었다. 그는 어디에서 창조적 영감을 얻을까? "당신은 모든 것에서 영감을 찾을 수 있다. 만일 찾을 수 없다면 다시 한번 보라." 일상에서 끊임없이 창의적 소재를 발굴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창작시스템을 갖춘 경우다. 그들에겐 쉽고 일반인들에게는 어렵다.

창의성에도 공간이 중요할까? 폴 스미스에게 런던에서 작업하는 이유를 물었다. ‘런던에 사는 것이란, 다양성으로 둘러 쌓인 세상 속에 산다고 할 수 있다. 런던에 살면 300개 이상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진짜다. 그 엄청나고 개성이 넘치는 다양성의 세계가 뻔하지 않은 디자인, 수평적이고 상상력이 발휘된 독창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낸다.’[4] 창의성에도 공간적 배경이 필요하다. 뻔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성이 서로 겹겹이 쌓여 있는 공간 말이다.

런던이나 홍대 앞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소설가 김연수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일산에 산다. 김연수 작품은 대부분 공원에서 나왔다. 그는 호수공원이 가까운 작업실에서 글을 쓴다. 호수공원에서 한동안 오른쪽으로 돌다가 갑자기 왼쪽으로 돌면 많은 것이 새롭게 보인다고 한다. 그는 공원에서 뛰고, 걷고, 생각한다. 그에게 공원은 창작의 하드웨어다. 그의 노트북에는 다양한 상상력을 작품으로 빚어내는 소프트웨어가 있다. 그렇게 자신만의 창작시스템을 가동한다.

작가 김연수는 다른 지역에서는 글이 잘 안 써진다고 했다. 사람들이 말 걸고 신경 쓰는 게 귀찮아 창작촌에도 가지 않는다. “여행지나 이동 중에는 글을 못 써요. 제 공간을 장악해야 하거든요. 대부분 제 글들을 이 공원 옆에서 썼어요. 호수한테 고맙다는 생각이 드네요.”[5] 그가 공원과 인연을 맺은 이유는 서러움 때문이다. 스물여섯, 무명의 백수 작가는 막막했다. 서글픔을 잊기 위해 공원에 나와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에게 창의성의 원천은 공원과 달리기다. 공원 주변에서 책읽기, 음악듣기, 고쳐 쓰기를 겹쳐낸다. 그의 창작법은 동사 네 개로 압축된다. 보고 듣고 뛰고 쓴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자질

 


<그래프> IBM ‘향후 5년 가장 중요한 리더의 자질설문조사(2010)

 

 

가장 중요한 리더의 자질은 무엇일까?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리더의 자질을 순위대로 매겨달라고 했다. IBM이 수행한 설문조사에 60개국 33개 업종 1541명의 CEO와 기관장이 답변을 보내왔다.[6]창조성이 가장 중요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CEO 스스로도 창의적 해법이 절실하다는 반증이다. 창조성은 우리시대 가장 절실한 리더의 자질이다.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더욱 창의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지속적으로 탁월한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조직과 개인은 누구인가? 저마다 명단이 다를 것이다. 새것을 만들지 못하면 끝장나는 개인이나 조직을 떠올려보자. 매일매일이 새것을 빚어내는 대상을 찾아보자.

우선, 개인분야에서는 작가들을 주목하려 한다. 남의 작품을 베끼는 작가의 미래는 없다. 남이 하지 않았던 것으로 새것을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작품성과 대중성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소설가 황석영은 작가는 영원한 벤처라고 했다. 미술, 음악, 사진, 문학 어느 장르건 뛰어난 작품을 꾸준히 양산하는 작가라면 누구라도 연구해보고 싶다.

두 번째는 산업분야를 둘러보자.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지 못하면 당장 문을 닫아야 하는 분야는 어디일까? 여러 분야를 거론할 수 있겠지만 영화산업은 단연 주목할만하다. 기존 작품을 똑같이 모방해서는 활로를 찾을 수 없다. 영화산업은 대표적인 고위험 감수사업이다. 개인 작가들이 개별역량에 의존하는 반면, 영화산업은 기획, 투자, 제작, 촬영, 마케팅, 유통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 참여인원에서부터 규모가 다르다.

 

영화감독처럼 움직인다면

 

<사진 4> 봉준호 감독(동아일보, 2013.07.25)

 

봉준호 감독을 주목하는 이유는 역할의 중첩성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은 직접 시나리오를 쓴다는 점에서 작가적 성격을 띤다. 관객을 만족시켜 투자자들의 이익을 실현해야 하는 감독으로서 경영자적 위상을 갖는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그의 존재적 중첩성은 시나리오 작가, 400억 투자금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제작책임자, 수백 명의 배우와 스태프를 통솔하는 리더, 세 가지의 핵심역할에 포개져 있다.   

봉준호 감독은 평상시에 어떻게 작업할까? 조사하고 연구하고 찾아보고 쓴다. <살인의 추억><마더>에 단역으로 출연한 특이한 신문기자가 있다. 그는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과 문화대기자를 지낸 이대현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봉준호의 놀라운디테일은 그 다음에서 확인됐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큼지막한 가방에서 엄청난 양의 서류를 꺼냈다. 모두화성연쇄살인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당시 수사기록, 신문기사, 그리고 관련인물을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것들도 있었다.” 이대현은 봉준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기자 같다. 당신이 기자 해라.[7]

<마더>에서 국민배우 김혜자는 뺨을 맞는 장면을 연기했다. ‘국민배우반열에서 엄마몫은 김혜자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 47년 동안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런 김혜자도 47년 동안 현실과 극중 어디에서도 따귀를 맞아본 적이 없었단다. <마더>에서는 따귀 맞는 장면 하나를 찍는 데 스무 번을 다시 찍었다. 김혜자의 따귀를 고막이 떨어지도록 매섭게때릴 수 있는 감독이 봉준호다.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자 김혜자의 뺨을 스무 번 때릴 수 있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김혜자 앞에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작아지는 연기자는 안 된다. 정말 기가 센 배우를 찾아내야 했다. 봉준호 감독은 평상시 충무로 연극을 보며 연기자에 관한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그렇게 황영희라는 배우를 찾아냈다.

김혜자 선생님에게 똑 같은 장면에 대한 연기지시를 서른 번 다시 할 수 있는 감독이 몇이나 될까? 그녀의 역량을 완전히 꿰고 있어야 가능하다. 같은 장면을 서른 번 다시 찍고 나서 선생님, 이번 것도 너무 좋았어요. 16번째와 30번째 두 개 중에서 고를게요.” 봉감독의 집요함과 김혜자의 노력은 촬영이 끝난 후에 뿌듯한 보상을 받았다. <마더>라는 작품을 통해 김혜자는 전세계 영화제에서 13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집어넣기와 끌어내기

 

테마파크 에버랜드의 누적 입장객이 2억명을 돌파했다. 1972년 개장 후 37년만인 2013년에 세운 기록이다. 2억명을 37년으로 나눠보니 연간 540만이 다녀간 셈이다. 2001~2013년 사이에만 1억명이 다녀갔다고 하니 연평균 770만명이 다녀갔다.[8] 에버랜드 홈페이지는 즐길거리를 어트렉션, 엔터테인먼트, 주토피아, 정원, 레스토랑, 글램핑으로 구분하고 있다.  수 많은 동물, 식물, 공연, 볼거리가 가득하다. 여름에는 워터파크도 붐빈다. 그저 평범했을 야산에 새로운 놀이동산을 집어넣었다. 37년 넘게 다듬고 바꾸며 상상력의 한계를 실험해왔다.

문화관광체육부가 운영하는 관광지식정보시스템은 전국 주요 관광지의 방문객수를 공개한다. 특히 유료 관광지의 통계는 더 주목할만하다. 2013년 집계를 살펴보면, 에버랜드가 연간 방문객 730만으로 1위에 올랐다. 2위는 순천만자연생태공원으로 699만이었다. 2012년 여수엑스포, KTX 개통, 2013년 정원박람회가 연달아 열리며 순천만을 찾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었다. <지도 3>은 영호남지역 800여 관광지 중에서 2013년 연간 방문객 100만 이상인 곳만 추려 지도에 옮겼다.

순천만은 원래 있던 갯벌, 갈대밭, 수로 위에 최소한의 갑판 산책로를 설치하고 인근 야산에 전망대를 설치한 것이 투자의 대부분이다. 최근에야 탐방선과 작은 코끼리 열차가 등장했지만 기본적으로 생태공원의 취지를 살려 인공적인 시도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빼고 자연상태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한때 교육의 초점은 집어넣기에 있었다. 상대방을 빈 책장으로 설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을 자꾸 넣어주는 쪽으로 노력한다. ‘집어넣기가 언제나 효과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요즘에는 끌어내기에 주목한다. 이미 상대방 내면에 있는 역량을 꺼내어 보여준다.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잠재력을 확인하여 스스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에버랜드는 평범한 야산에 집어넣기방식으로 놀이를 기획하고 설계해서 730만을 불러 모은다. 순천만 갯벌공원은 원래 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끌어내기방식으로 699만을 불러 모았다. 어느 일방만으로 창의를 완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보태고 끌어내는 양자의 반복과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순천만생태공원의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해볼 만 하다. 갯벌을 쓸모 없는 땅이 아니라 생태의 보고로 인식을 바꾸는 것으로 전에 없던 가치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지도 3> 남도지역 주요 관광지 방문객 분포도(관광지식정보시스템, 2013)

 

자신만의 창조공간

 

봉준호 감독은 카페에서 쓴다. <살인의 추억> <마더> <설국열차> 모두 카페에서 작업했다. 초보 감독시절, 멀리 두 달 동안 시나리오 쓰러 갔다가 한 줄도 못쓰고 빈손으로 돌아온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 후에 스스로 터득한 창작방식이다. 일단 카페에서는 쉬고 싶다고 드러누울 수 없어서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편안함이 교차한다고 했다. 적당히 소음이 깔리는 카페에서 귀에는 이어폰을 꽂는다. 음질이 꽉 차는 바하의 바로크 음악을 소음차단용으로 자주 듣는다. 가사가 있거나 감정기복이 심한 음악은 작품을 쓰는데 방해가 된다.

작가 김훈은 멀리 떠나서 쓴다. 작품에 대한 구상, 자료준비, 외부와의 인터뷰 등은 일산의 작업실에서 한다. 하지만 실제 작품을 원고지에 옮기는 작업은 외딴 곳을 선호한다. <칼의 노래>는 전남 나주 빈 농가에서 작업했다. <흑산>은 안산 선감도에서 썼다. 2013년에는 동해안 죽변항 후정리에서 썼다. 유배지의 선비처럼 골방에 스스로를 격리해놓고 육군사관학교생도처럼 스스로 군기를 잡아가며 쓴다. 냉장고에 물과 감자 외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소설가 조정래는 집에서 쓴다. <정글만리>를 쓸 때 그는 중국에 관한 신문, 잡지, 전문지를 스크랩 해서 1차 취재노트를 만들었다. 2차로 중국관련 서적 80권을 수험생 공부하듯꼼꼼히 읽으며 밑줄치고 메모하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자료정리를 했다. 3차로 중국 현지에 10여 차례 직접 취재를 나가 현장을 방문하고 사람들을 인터뷰해 주요 장면들의 구체성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만든 취재수첩만 90권이 넘는다. 다시 자택의 집필실로 돌아와 매일 작업분량을 기록하며 써나갔다.

전업작가들의 작업방식은 제각각이다. 직장인도 자신만의 창작시스템은 검토할 만 하다. 보통 정보시스템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 사용자로 구성된다. 어디에서 꾸준히 창의적 아이디어를 확보하고 창조를 위한 데이터를 모으고 쌓아둘 것인가? 이것을 어떻게 가공할 것인지 자신만의 시공간을 만들어볼 일이다.

 

서성거리는 창의력

 

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가 남녀직장인 527명을 대상으로창의성에 대해 설문 조사를 벌였다. 일하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가 자주 있는가? 응답자의 65.3%많다고 답했다. 아이디어가 필요한 순간, 직장인들이 고민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자료 찾기(44.0%), 성공사례 벤치마킹(42.3%), 포스트잇 활용하기(38.7%) 브레인스토밍(28.7%) 순으로 높았다.[9] 이상 나열된 시도들은 모두 책상 앞에서 머리로 하는 것들이다. 비슷비슷한 자료를 찾고 유사한 사례를 뒤져 거기서 거기인 아이디어를 토론하기 쉽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안목 새로운 경험이 절실해진다.

창의적 시도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책을 10권 정도 내면요, 재능이라는 말은 무의미해요. …… 제가 바뀐 건 그때부터죠.” 한 권의 책을 낼 때마다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한 권의 책을 낸 후에 책을 내기 전의 사람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글을 쓴다는 건 글을 쓰기 위해 한 일들이 자신을 바꾸는 거죠. 약간씩 바뀌고 바뀌다가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거예요.” 소설가 김연수는 말한다.[10] 그는 오늘도 공원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 책을 쓰며 또 다시 변할 스스로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창조과정에서 스스로 변한다는 경험담은 용기를 준다. 창조적 시도자는 그 과정에서 더욱 창의적 존재로 거듭 난다니. 작가가 아니면 어떤가! 홍대 에 사무실을 낸지 5년이 지났다. 산책하듯 홍대상권 골목골목을 둘러본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프로젝트가 많아졌다. 자료를 찾기도 힘들고 유사사례도 거의 없다. 베낄 수도 없으니 새로 하는 수 밖에 없다. 따로 길이 없으니 스스로 길을 만들며 가야 한다. 그런 심정으로 매일매일 새로 여는 가게와 망해서 사라지는 가게 앞을 서성거린다.



[1] 서울메트로 2013년 지하철통계

[2] 콘텐트 공유싸이트 Flickr.com에서 iM4X님이 <사진 1>, Mud Boy님이 <사진 2>를 제공했다.

[3] 인터뷰 매거진 라이프러리(Liferary.org), 2014.07.27

[4] 디자인하우스, 런던은 어떻게 세계 디자인의 중심이 되었나, 월간디자인, 2014 11월호, p. 144

[5] 전지현·정슬기, 예술가의 공간 - 소설가 김연수 일산 호수공원, 매일경제, 2012.07.25

[6] IBM 기업가치연구소, 글로벌 CEO 스터디 결과요약(Capitalizing on Complexity), 2010, p. 24

[7] 이대현, <설국열차> 봉준호 영화가 '영화'인 세 가지 이유, 전자신문, 2013.11.03

[8] 연합뉴스, 2013.08.19

[9] 김효정, 과반수 직장인 '창의성' 필요해, 브레인미디어, 2013.02.15

[10] 정문정, 프로소설가로 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대학내일, 201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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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1.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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